(왼쪽부터)윤모세,이국자, 잔 박 시의원, 김백규 전 한인회장, 잔 박의원 지지자 /코리안뉴스애틀랜타 자료사진
득표율 65%, 일본측 지원받은 상대후보 꺽어
성원해준 한인 여러분들께 감사의 뜻 전해
애틀랜타 한인들 5만5천달러 모금, 선거지원
3일 새벽 1시30분, 드디어 존박 브룩헤이븐 시의원이 3선에 당선됐다. 디캡카운티 선거결과 웹싸이트와 선거전문웹싸이트인 R/IN은 100% 집계가 완료되고 존박 현 시의원이 1509표를 얻어(65%), 825표를 (35%)를 얻은 상대 후보 케이티 두나간에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밝혔다.
시의원 선거가 종료된 2일, 밤 8시37분에 부재자투표 일부 결과가 집계 됐는데, 그 중 약 23%가 케이티 더건에게, 약 76%가 현직 존 박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이날 박 시의원은 오후 10시, 오후 11시, 다음날인 오전 0시30분 등에도 꾸준히 65%대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3선 시의원이 된 박 시의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백규 소녀상 위원회장님을 비롯해 많은 한인들이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또 “상대 후보가 야드 싸인을 훔쳐가고 비방하는 등 공정한 캠페인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주민들이 그러한 사실들을 일러주며 지지를 해 줬다”고 덧붙였다.
박 시의원은 이번 선거에 400 여 개의 야드 싸인을 곳곳에 설치하고, 지지자들과 함께 3000여 명의 투표자들을 가가호호 방문하고 앱에 일일이 이를 기록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 주민들과의 직접 만남을 통해 어느정도 당선 확신이 들었다고 밝혔다.
소녀상에 대해서도 “이제는 걱정이 없다. 안전하다” 고 말했다. 시의원 중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낸 1 명이 있었는데, 이제 임기가 끝나 시의원 전체가 모두 긍정적인 분위기라고 전했다.
<존박 시의원 당선소감>
존박 현 시의원은 애틀랜타 소녀상과 깊은 관계에 있는데, 브룩헤이븐시 블랙번공원에 위치한 애틀랜타 소녀상은 지난 2017년 6월30일에 제막식을 가졌으며, 소녀상을 헌당하고 보존하는데 존박 현 시의원이 많이 기여해 왔다.
소녀상은 원래 2016년에 애틀랜타 중심지인 국립민권인권센터에 건립될 예정이었으나 애틀랜타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집요한 방해로 건립이 좌절됐으며, 이에 박 시의원이 소녀상을 건립할 대체 장소로 브룩헤이븐 시 공원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시노즈카 다카시 당시 일본 총영사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망언을 내뱉어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고, 일본 총영사관 소속 외교관이 브룩헤이븐 시의회까지 출석해 반대 로비를 펼치기도 했다.
일본 측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애틀랜타 평화의 소녀상은 2017년 브룩헤이븐 시 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이 소녀상은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공원과 미시간주 사우스필드 한인문화회관에 이어 미국 내에 세 번째로 세워졌다.
박 시의원은 2014년 보궐선거로 처음 당선됐으며, 2017년 경쟁자 없이 단독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올해 선거에는 경쟁자 케이티 듀너건 후보가 나타나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졌다. 이에 애틀랜타 평화의 소녀상 건립위원회와 한인들은 박 시의원을 위해 5만5천달러(약 6천500만원)의 선거자금을 모금하며 지원했다.
한편, 이날 김백규 위원장을 비롯, 이국자,윤모세, 박건권 소녀상 위원들과 이종원 변호사 등 지지자들은 와칭 파티에 참석해, 당선을 축하했다. 소녀상 지킴이 단톡방에서는 권요한 전 조지아 체육회장이 3일 새벽 당선 사실을 제일 먼저 알렸고, 이를 축하하는 한인들이 메세지가 연이어 올라왔다.
서구 열강이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며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던 15~16세기 대항해시대에는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식민도시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조달했다. 마닐라, 마카오, 나가사키 등 아시아로도 진출한 이들은 일본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도 헐값에 노예로 사들였다.
가노 나이젠 작 ‘남만 병풍에 묘사된 포르투갈인을 따르는 노예들’[흑인 외에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수행하고 있다. 산지니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루시오 데 소우사 도쿄외국어대 특임 준교수와 오카 미호코 도쿄대 사료편찬소 준교수가 함께 쓴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산지니)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 노예의 인신매매, 일본인 노예의 존재를 조명한 책이다.
저자들은 나가사키, 마닐라, 멕시코시티를 전전하며 살았던 유대인 페레스 일가의 이단 심문 재판기록, 일본 사료 등을 토대로 15~16세기 일본인 노예들의 자취를 추적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가족에게 팔려 가거나 납치되거나 전쟁 포로가 되거나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서양인의 노예가 됐다.
이들은 주로 가사 노동을 담당했고, 그 외에도 하급 선원, 용병, 교회의 종복, 주술사, 전문 기술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마카오, 마닐라 등 동아시아 식민도시에 거주했지만, 주인을 따라다니며 포르투갈, 멕시코 등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기도 했다.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로 확대하면 당시 동아시아에는 왜구의 활동, 임진왜란 등 전쟁이 빈번해 인신매매 등이 횡행했다.
“왜구에 의한 중국 연안 지역 약탈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인신매매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당시 동아시아 해역에서 막 교역을 시작한 유럽인도 그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출신 노예의 행동 범위가 글로벌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 중국인 여성은 왜구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 포르투갈인에 팔렸다. 빅토리아 디아스라는 이름을 받은 그녀는 이후 말라카, 고아, 리스본을 거쳐 앤트워프, 함부르크에서 살았다.
린스호텐 ‘동방안내기’ 삽화[고아 중심부. 다양한 노예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산지니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조선인들도 노예로 살았다. 주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그들은 시장에서 비싼 값을 받는 귀중한 노동력인 젊은이들과 어린 포로들이 많았다. 전쟁 중에는 매년 수천 명이 넘는 포로들이 유입되면서 공급 과잉에 따라 노예 가격이 내려가기도 했다.
16세기 말 피렌체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일본 시장에서 본 조선인 노예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모든 연령대의 남성, 여성들이 수많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누구나 아주 싼값에 팔렸고, 나 자신도 다섯 명의 노예를 겨우 12에스쿠드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책은 이처럼 서양인이 주도한 대항해시대의 이면에 노예무역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저자들은 “바다를 건넌 노예들의 생애는 전란 중에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악한 생활 환경에 있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사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