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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 칼럼] 합리적, 이유있는 아우성이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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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 시인

한국 교과서에 실린 시 중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시적 은유는 역사와 세계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틀을 제공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한계를 절감하는 작은 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작은 자들이라 함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고통의 자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불만을 토로하지 못한다. 공의롭지 못한 압제도 견뎌야만 하고, 목놓아 하소연할 곳도 없다. 연일 뜨겁게 달구는 뉴스들을 보면 ‘소리 없는’ 대신에 ‘소리 있는 아우성’이 더 어울린듯 하다. 더 나아가 이런 어정뜬 상황을 ‘합리적 이유 있는 아우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우성이 발현된 시작은 다양하겠지만 인간 사회안에 자리한 차별이다.

차별은 하는 자(doer)와 당하는 자(receiver)로 구분된다. 가해자(perpetrator)와 피해자(victim)인 셈이다. 가해자는 자신들의 클래스와 세력을 유지하고자 의도적 차별을 가한다. 피해자는 외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차별을 받게 되는 쪽이다.

차별의 형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이는 것은 침략과 정복, 착취와 유린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문화와 사회의 계급 안에서 존재한다.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좋은 예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의 수직구조 안에 계층 갈등과 차별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미래는 어떠한가? 만화나 영화가 미래를 잘 그려낸다면, ‘설국열차’ ‘헝거게임’ 등에서 보면 차별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오늘 다루려는 차별은 국가와 대륙에서 벌어지는 침략과 정복의 문제이다. 제국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이 벌인 추악한 차별을 말한다. 이 차별은 지배자(제국)와 피지배자(식민지)로 구분하여 일방적인 착취였다. 인간의 존엄이란 없었다. 신대륙과 남반구에 위치한 많은 나라들이 제국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신대륙 발견, 산업화, 세계대전, 냉전을 겪으며 침략, 정복, 수탈 등이 끊이지 않았다. 북반구도 서로 먹고 먹히는 암울한 전쟁의 서사를 쓰고 있었다.

제국주의가 종식된 현재에도 차별은 보이지 않는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과 부정의로 스멀스멀 존재한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졌고, 성숙하지 못한 정치로 아우성은 더욱 들끓고 있다. 식민지들 사람들이 재주를 부려서 번 돈을 정복자들이 누리고 산 꼴이다. 문제는 여전히 많은 나라들에서 합리적 이유 있는 아우성이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 있는 아우성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우성 밖에는 낼 수 없는 작은 자들에게는 책임이 없다. 무능하다거나 게으르다고 돌을 던지지 말아라. 그들은 피해자들일 뿐이다. 책임은 침략과 정복을 일삼아 지배했던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국가들에게 있다. 현재 제국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선진 문화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목을 곧 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반성하고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유대인 박물관 및 추모 공원들을 지어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베를린 도심에 콘크리트 덩어리 2711개를 설치하여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Stolperstein 프로젝트’이다. 도시의 보도 블록을 장애물처럼 튀어나오게 설치한 것이다. 그 블록에 나치에게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새겨 넣었다. 발끝에 부딪칠 때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려는 반성의 노력들이다. 이 어찌 갸륵하지 아니한가.

대조적으로 일본은 어떠한가? 인터넷 뉴스에서 재일 코리안 청년 연합 스탭인 량영성씨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2013년 6월 오오쿠보에서 필자가 본 광경을 문장으로 해 보면 다음과 같다. 휴일의 동경 오오쿠보거리를 ‘좋은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모두 죽여라’ 등 살인.제노사이드 교사(敎唆)부터 ‘바퀴벌레 새끼’ 등 민족집단을 통째로 ‘해충=구제대상물’로 비유하는 것까지 보통은 절대 볼 수 없는 문구가 쓰여진 플래카드를 손에 들고, 그보다 더 추악한 욕들을 계속 외쳐댔다.’ 전범국가인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일본 정부의 색깔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놀랄 따름이다.

독일인들의 성숙하고 갸륵한 노력이 부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불합리하게 죽어갔던 자국민들의 아픔조차도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가? 왜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고 핑계와 남 탓만 하는가? 왜 미안함과 반성은커녕 흔적을 지우려고만 하는가? 세월호, 이태원 참사, 소녀상, 독립운동가들, 그들도 모두 피해자들이다. 만약 독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무척 궁금해진다.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은 어떠한가? 모두 침묵들이다. 당당하게 박물관에 도둑질한 보물을 전시하고 있지 않는가. 혹시 신문물을 전달한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면 그들의 양심은 예전에 천박한 엿장수의 것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곳곳에서 정치적 불안, 경제적 고통, 독재 정권, 기후 위기, 전쟁 등으로 합리적 이유 있는 아우성들이 들끓고 있다. 하늘은 고통받는 자들의 아우성을 절대로 묵과하지 않는다. 가해자들은 합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떠한 이유로든 피해자들에게 돌을 던지지 마라. 하늘이 격노할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용솟음치는 합리적 이유 있는 아우성들이 들리는가? 만약 어렴풋하게 들린다면, 당신은 불평등과 부정의를 인지하는 귀를 가진 사람이다. 당신은 따뜻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상운 시인은 가족치료 상담가로 활동하며, (시집) ‘광야 위에 서다 그리고 광야에게 묻다’, ‘날지 못한 새도 아름답다’가 있다.

본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행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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