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우, 재미화가
고전의 향기-하정 유관(河亭 柳寬)
●프롤로그
어느덧 칠월도 그 하순을 향해 곤두박질 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에 역대급 폭염과 함께 엎친데 덮친격으로 집중호우를 동반한 ‘수재해(水災害)’까지 발생했다는 ‘비보’에 그저 모골이 송연해져 올 뿐이다.
이상기후로 인해 온열 질환자들이 속출한 가운데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도로가 침수 당하고, 주택파손에 토사 유출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폐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하니, 재외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마음이 몹시 무겁고 언짢아 진다.
기후위기 시대, 지구촌 곳곳에서 속출하는 재해앞에 속수무책인 AI 최첨단 문명시대의 민낯이 오늘따라 못내 애처롭고 처연하기 그지 없는 심경마져 차마 감출길이 없다.
모쪼록 일 하는 국민주권 시대를 연 새정부의 신속한 대응과 함께 조속한 회복을 기원해 마지 않는다.
불현듯 故 노무현 대통령께서 언급한 ‘’비가와도 내 탓인 것 같고 비가 안 와도 내 탓인 것 만 같다’’는 그가 생전에 남긴 불세출 어록이 급소환 되는 순간이다.
비가 오고 안 오는것이 어찌 대통령의 탓이겠는가? 만서도 대통령이라는 책무가 적어도 민생을 잘 챙기고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인 만큼 공직자로서의 투철한 ‘애민정신’에서 나온 참으로 고결한 ‘어록청상’ 이었다고 평전된다.
돌이켜 보건데 대형참사 앞에서도 대통령은 고사하고 주무부처 핵심 공직자들 조차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머리숙여 사과 한마디 제대로 표명한적 없는 몰지각한 지난 정부 각료들의 낯두꺼운 처세들을 직접 체화 당해 오다 보니, 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연한 어록이 마치 ‘금과옥조’와 같이 ‘격세지감’으로 다가오는 것도 저의기 부인 할길 없는 사실이다.
비록 ‘레토릭(rhetoric)’의 반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탐관오리’들의 폭정은 피폐하기 그지없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으로 고스란히 환원 당하는 법이다.
각설하고 요사히 필자가 필독하고 있는 서책 중, 고전인물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엮여진 소설가 이용범 선생의 저작물인 ‘인생의 참스승-선비'(2004년 도서출판 바움 출판도서) 제 227쪽에 수록된 1424년 세종 치세당시 우의정을 지난 바 있는 하정 ‘유관’에 얽힌 일화가 문득 떠올라 이곳에 한번 소환 해 보고자 한다.
‘유관’은 황희 등과 함께 세종임금 때 정승을 지낸 ‘청백리’로 잘 알려진 매우 명망 높은 인물 이었다.
정승 신분이었음에도 흥인문 밖에 위치한 그의 가옥은 고작 두어 칸 밖에 안되는 울타리 조차도 없는 남루하고 허름하기 짝이없는 초가집 이었고 ‘정승’ 처지인 ‘유관’은 그 곳에 기거하며 베옷과 짚신으로 몸소 청빈한 삶을 시전 하였다.
오죽하면 유관보다 품계가 낮은 개념있는 조정관리가 어느날 유관의 처소를 방문, 소위 일인지하 만인지상 신분의 남루한 가옥를 보고 되돌아가 크게 뉘우쳐 자신의 집 행랑채를 허물고 깊이 반성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가 도성을 출입 할 때면 ‘정승’ 직분에 걸맞는 한무리의 하인들을 대동한 ‘사인교(四人轎)’나 ‘말’을 타지 않고 언제나 낡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 한 채 홀로 걸어 다니는게 일상이었다.
‘사인교(四人轎)’란 ‘정승’들이 출타시 타고 다니던 ‘가마’로 네 사람이 메고 다니는 이른바 조선시대 정2품 판서급 관리나 재상들이 주로 이용했던 운송수단을 일컬음이다.
어느해 여름, 한 달이 넘게 장마비가 내렸는데 소위 정승집 지붕에 구멍이 뻥 뚫려 여기저기 빗물이 샜다.
때마침 그의 부인이 우산을 가져다 주자 유관은 그 우산으로 머리를 가린 채 아내를 향해 읍조리듯 토로 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장마를 견뎌 낼꼬?”
어느날 세종임금이 ‘민정시찰’ 길에 올라, 우연히 흥인문 밖 유관의 집 앞을 지나치다 울타리가 없는 것을 목도하고 이내 탄식하였다.
이윽고 청빈한 유관의 성품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세종’이 조용히 ‘선공관’을 불러 명하였다.
“오늘 짐이 유관의 가옥을 보니 초가집에 울타리 조차 없었소. 그대는 그 집에 가서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오되, 혹여 유관이 이 사실을 알면 필경 거절 할 터이니 밤늦게 쥐도새도 모르게 일을 마치고 오도록 하오!”
어명을 받은 선공관이 야음을 틈타 몰래 유관의 집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되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이 사실을 목도하게 된 유관이 필경 임금이 명한것을 짐작하고, 지체없이 입궐하여 임금을 알현한 뒤 정중히 엎드려 사양의 뜻을 고했다.
훗 날, 유관의 아들 ‘유계문’이 정2품 판서직에 오른 직 후 집을 제법 크고, 구태여 요즘 말로 표현하자고 들면 한마디로 ‘럭셔리’ 하게 지었다.
그는 아들을 호되게 꾸짖어 지체없이 중단 할 것을 명하고 검소하게 다시 고쳐 짓도록 했다.
그가 정승에 오른 지 30여년이 흘렀을 때, 주변 지인들이 “이제 집 울타리를 세우고 대문도 만들라는 권면을 받을 때 마다 유관은 다음과 같이 일갈 했다.
“정승이 되어 갑자기 살던 집을 번듯하게 고치게 되면 과연 세인들이 뭐라고 손가릭질 할것인가? 비록 베옷에 쑥대로 만든 초가집 일 지라도 나에게는 부족하지 않으며 높은 벼슬도 영광스런 것이 아닌게요”
정승이라지만 유관의 삶은 이름도 지위도 없는 한낱 평민들의 궁핍하고 남루한 삶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혹여 손님이 찿아오면 한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뛰쳐나가 반갑게 손님을 맞아 대접했으며 집 마당에 채마밭을 마련하여 친히 호미를 들고 정성스레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쓰려고 일찌기 통나무 관를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누이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망설임 없이 그 관을 내어 주었다.
급기야 유관이 향년 81세로 운명을 달리 했을 때, 그의 주군인 세종은 흰 도포와 검은 모자에 검은 띠를 두루고, ‘백관(관직에 있는 모든사림)’들을 거느린 채 밖에 장막을 쳐놓고 심히 애통 해 하였다고 전한다.
하정 유관 (河亭 柳寬)에 대해 검색해 보면 고려 말 에서 조선 초의 문신으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던 명망높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성균관 대사성에 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에 이르기 까지 네 임금을 두루 섬긴 청백리 충신 이었다.
흥인문 밖 초가집에 기거하며, 담이나 대문을 세우지 않았던 건 이름없는 민초들에 이르기 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며 그들이 전하는 각종 민원들을 여과 없이 청취 하고자 함이었다.
●에필로그
탁류시대 국가의 녹을 먹고 호가호위 해가며 민생은 뒷전이고 한낱 당리당략에 휩쌓인 채 국민이 준 권력을 남용하여 사리사욕만을 탐하여 성난 민심의 도마위에 올라 난도질 당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철면피 야바위 정치꾼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더도 덜도 말고 딱 ‘유관’ 같은 청백리 공직자 한사람을 만나기가 흡사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와 같은 희박한 발원이라는게 못내 서글프고 처연하기가 한량이 없다.
*본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