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우, 재미 화가
[프롤로그]매해 오월이 오면 마치 주술에 걸린듯 떠오르는 처연한 기억들!
금년에도 어김없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아련하게 펼쳐진 채, 우리들의 일상을 촉촉히 적셔온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님을위한 행진곡-
박제된 기억속의 님들은 대체 어디 쯤 머물고 있을까?
그런대로 변화된 오늘의 민주세상을 지긋히 내려다 보며 과연 만족 해 하고는 계실까?
1980년 5월
광주의 몸부림이 그토록 처연했던 건
한많은 겨례의 민주 새벽을 열기위한
한바탕 살풀이 였나보다.
그날의 광주는 군화발에 짓밟혀 고립되다 못해 세상과도 격리 당한 채 철저하게 왜곡 되었다.
까닭에 45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날의 진실에 대해 ‘참’과 ‘거짓’이 뒤범벅된 한 낱 선동으로 얼룩진 진영 갈등이 첨예하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극 이란게 이런 것일까?
죽은자가 산자들을 살릴수 있다는 논거속엔 진실과 함께 우리가 미처 체화해 내지 못 해 휘둘리기 쉬운 비 실체적 이율배반의 간극이 공존 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 들의 무수한 입놀림을 통해 정작 진실과 무관한 허무 맹랑한 픽션 스토리들 만을 속절없이 재 생산해 낼 뿐이다.
정령 ‘허구’는 결코 ‘참’이 될 수 없고,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애오라지 그날에 멈춰버린 시간의 증인들은 오늘도 망월동에 묻힌 채 한마디 말이 없다.
45년이 흐른 지금에도 매해 찿아오는 5월의 광주는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소환해 낼 뿐, 희생자 유가족들의 상처로 얼룩진 가슴속 깊히 천착된 한 들을 눈꼽만큼도 달랠 길이 없다.
그날의 희생자들 대부분이 앞길이 구만리 장천인 꿈많은 학생들이요, 성실한 노동자 였고 무고한 시민 들이었다.
그중에 더러는 산 달이 임박한 ‘모태(母胎)’속 생명체 들도 있었다.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한 채 곧바로 ‘영면’해 버린 아기 생명체 들은 지금 쯤 ‘환생(還生) 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자 알 살아가고는 있는걸까?
80년 5월 그날의 진실들을 외면하다 못해 철저하게 짓밟고 왜곡하는 한낱 ‘후안무치’한 세력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늘도 여전히 세찬 광장 바람에 나부끼고 흔들려가며 여전히 그날의 희생을 재 소환해 내고 있다.
그토록 수많은 목숨들이 제물되어 빗장 열고 쟁취한 민주주의 였건만 아직도 떫은 감 마냥 설익은 상태라니 ‘비분강개’ 하다못해 대성 통곡 할 일이 아니랴!
그런면에서 끝난게 끝난것이 아니듯, 5.18 민중봉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올해로 제 45주기 째 맞이하게 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머리속이 복잡한건 절망과 함께 밀려드는 나 혼자 만의 섣부른 감정 탓일까?
우리가 직접 체화당하지 않았던 선험적인 과거사 들을 죄 다 차치 하고서라도 우리 몸으로 직접 겪어가며 경험해 왔던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 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 사실 중 하나가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된다”는 명시적 워딩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겪고 유린 당해야 깨우칠 텐가?
앞서간 선각 호국영령들을 추념하는 행위는 오늘을 살아가는 빚진 자 들의 절망을 치환시키고 절망의 순간에 조차 새로운 방향 모색을 도모함으로서 완전한 회복을 위한 염원이 담긴 마지막 최후의 몸부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일상이 비교적 자유로운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5.18 희생자들과 무관한 자유가 아니라면 최소한 5.18 추념 헌화에 머리숙여 동참해야 할 이유가 명료하다.
[에필로그]다시 만난 오월!!!, 어느덧 45주기 째 맞이하게 된 5•18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현지 애틀랜타에서 개최되는 금년도 추념식 일정은 아래와 같다.
삼가 현지 동포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고대 해 마지 않는 바이다.
[]제 45주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일시/2025년 5월 18일(일) 오후 5:00
•장소/둘루스 소재-“The PARTY”(석찬 제공)
•주소/3700 Venture Pkwy Duluth.GA 30096
*본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