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후 재심의 하기로
‘1·21 사과’ ‘남침 없을 것’ 등 발언은 공개된 남북회담 자료에서 확인
통일부가 6일 공개한 1천700쪽 분량의 1970년대 남북회담 문서에는 가장 큰 관심을 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일성 주석의 면담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회담문서공개심의회가 검토한 결과 비공개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면담 내용도 마찬가지로 비공개 결정됐다.
남북회담문서 공개 심의는 3년 주기여서 오는 2026년 다시 공개 여부가 논의된다.
면담 내용 자체는 비공개지만, 김일성의 일부 발언은 이후락 부장의 남북회담에서의 언급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김일성은 1972년 5일 비밀 방북한 이후락을 만나 1·21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6·25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락은 1972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에서 “지난번 (김일성) 수상께서도 좌경 맹동분자들의 책동을 나무란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며 “오늘 개별적으로 만나셨을 때에도 그 문제를 다시 언급하시더군요”라고 말했다.
여기서 좌경 맹동분자들의 책동이란 1968년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암살하고자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1·21 사태를 가리킨다.
장기영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부위원장도 1974년 제8차 회의에서 “1968년 1·21 사태에 대해서는 (북측이) 사건 당시 이것을 남한에서의 무장봉기라고 주장하다가 1972년 평양에서 이후락 씨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 자신이 자기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시인, 정중히 사과한 일이 있음에도”라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다시는 남침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게 이 부장의 전언이다.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 문서를 보면 이후락은 “나도 지난번 김일성 수상을 뵈었을 때 김일성 수상께서는 분명히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은 없을 터이니까 그렇게 박 대통령에게 전하시오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김 주석이 이후락을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다는 것도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공동위원장인 김주영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의 발언으로 확인된다.
이후락은 1973년 8월 북한의 일방적 대화 중단 선언 후 기자회견에서 “제가 5월 2일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이가 나를 보고 세 차례, 네 차례 말하기를 ‘부장 선생, 민족의 영웅이요, 영웅’하는 얘기를 합디다”라고 말했다.
회담문서를 보면 김영주 부장은 1972년 5월 평양을 방문한 이 부장에게 “27년 간 닫아놓은 문을 이후락 부장 선생이 열었으니까 용감한 분이고 영웅이란 말을 (김일성 수상이) 한 거지요”라고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이후락 부장이 남측 협상팀을 홀로 이끌었다면, 북측 공동위원장이자 7·4 남북공동성명에 함께 서명한 김영주 부장은 와병을 이유로 박성철 부수상을 대리로 내세우는 일이 빈번했다. 서울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한 인물도 박 부수상이었다.
남측은 이후락 부장이 김영주 부장이 아니라 대리인을 계속 만나는 데 대해 여론이 좋지 않다며 북측에 김영주 부장의 참석을 종용하는 대목이 회담문서에 여러 번 나온다. 북측은 이에 “다른 문제가 아니라 건강문제니 이해해달라”는 답을 반복한다.
1972년 11월 1일 이후락은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 후 판문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영주 부장의 건강문제에 대해 “내가 공식적으로 듣기에는 식물성 신경부조화증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당시 김영주 부장의 부재는 건강문제보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권력투쟁이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김영주 부장은 남북 비밀접촉 초기까지 2인자로 세력을 누렸으나 1973년 김일성 주석이 후계자로 김정일을 내정하면서 밀려났다.
남북회담문서에는 김일성의 호칭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남북 당국 간 접촉 초기 문서에는 김영주 부장 등이 김일성을 ‘총비(摠秘)동지’라고 간단히 지칭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다만 북측 대표들은 대체로 ‘수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1972년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채택 후에는 김일성의 권력이 강화하는 주석직이 신설됐다. 남측은 회담 석상에서 주로 ‘수상’이라는 호칭을 썼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