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전애틀랜타 한인문학회장
남이 南怡의 필화筆禍 사건
남이(南怡: 1441-1468)는 조선 세조 때의 무신.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조가 죽은 후 역모에 몰려 처형되었다.
본관은 의령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남빈(南份),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다. 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딸 정선공주(貞善公主)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러니까 정선공주는 남이의 할머니이다. 따라서 남이의 외증조부가 태종 이방원이다.
남이는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권람(權擥)의 딸과 결혼하여 남구을금(南求乙金)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사별했고, 고성 이씨(固城 李氏)와 다시 혼인했다. 그러나 고부 간에 갈등이 심하여 1468년(세조 14) 왕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받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남이와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 젊은 종친(宗親)들을 중용하여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려 했다. 남이는 세조가 1460년(세조 6)에 무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경진무거(庚辰武擧)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466년(세조 12)에 실시된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김용달(金用達)과 함께 포천(抱川), 영평(永平) 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했다.
그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이 도총사(都摠使)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군관으로 참여했다.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北靑)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일로 행 부호군(行 副護軍)이 되었으며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남이 南怡는 북정가北征歌라는 유명한 詩를 남겼다. 하지만 결국 南怡는 그 詩로 말미암아 모함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비운悲運을 맞는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행 호군(行 護軍)이 되어 종성(鍾城)에 주둔하며 온성(穩城), 경원(慶原), 경흥(慶興)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포상되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 同知事)가 되었다. 이어 명의 요동군(遼東軍)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윤필상(尹弼商)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하였다. 1468년(세조 14) 음력 5월에 서현정(序賢亭)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하였다가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다.
그해 7월 세조가 이준을 20대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남이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지위를 겸하게 했으며 8월에는 병조판서로 삼았지만 한계희(韓繼禧) 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에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겸사복장이 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468년(예종 1) 10월 어느 날 밤 하늘에서 흐르는 유성을 보고 남이 장군이 혼자말 처럼 “허, 이는 필시 헌 것이 가버리고 새 것이 올 징조로고”라고 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예종에게 고변함으로 역모의 혐의를 받았다. 그의 북정가北征歌는 이러하다.
북정가 北征歌/남이南怡 (1441-1468)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서 닳아 버리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서 없애리
사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화롭게 못하면
(사나이 이십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를 것인가
이 때 유자광은 南怡 將軍의 北征歌를 왜곡하여 역모의 증거라며 제시하였다. ‘男兒二十未平國’을 ‘男兒二十未得國’으로 변조하여 고변하였다.
그해 음력 10월 27일에 강순, 변영수(卞永壽), 변자의(卞自義), 문효량(文孝良)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韓明澮)의 노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다. 이 사건을 ‘남이의 옥(獄)’이라고 한다.
남이는 1818년(순조 18) 음력 3월 10일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청에 따라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910년(순종 3)에는 ‘충무’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남이 장군의 묘소로 전해지는 남이장군묘가 있고,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남이섬에도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그 옛날에도 시기와 질투가 낳은 이 비극으로 젊고 유망했던 한 젊은이가 어처구니 없이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이 이야기는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