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살며 생각하며] 와이로란 말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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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 전애틀랜타 한인문학회장

‘와이로’란 말은 ‘뇌물’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즉 요즈음의 말로 담뱃값, 떡값, 기름값, 약값, 사바사바, 뒷돈, 혹은 검은돈이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그 어원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 일본말 아닌가요?”하고 되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흔히 “이럴 땐 와이로를 쓰면 약효가 즉각 날 텐데.”뭐 이렇게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한문이다. 와이로(蛙利鷺)는 ‘개구리로 이익을 취한 백로’란 뜻이다. 그 ‘와이로(蛙利鷺) 란 말의 유래는 이러하다.

 고려 중후기의 유명한 학자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선생이 세 번이나 과거(科擧)에 낙방(落榜)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 때 집 대문(大門)에 붙어있던 글이 있었다. 그 글은 ‘唯我無蛙人生之限(유아무와인생지한)’이었다. 풀이하면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것이 인생의 한이로다.’라는 뜻이다.

고려 20대 왕 신종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夜行)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僥倖)히 민가(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유하고자 청했으나 집주인(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집(이규보)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하였다. ‘唯我無蛙人生之限(유아무와인생지한)’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로다다—‘도대체 저 글의 뜻이 뭘까?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것이 평생을 두고 한이 된다고?’ 생각할수록 의문과 호기심만 더 커지고 있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갖출 만큼의 지식(智識)은 갖추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개구리가 뭔데 인생의 한이라니 더욱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주막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먹으면서 주모(酒母)에게 외딴집(이규보 집)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科擧)에 낙방(落榜)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고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發動)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해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마침내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내기를 하자고 제안해왔다. 바로 "3일 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노래 시합의 심판(審判)은 백로(白鷺)가 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꾀꼬리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 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 시합을 제의하다니, 하지만 월등(越等)한 실력(實力)을 자신(自信) 했기에 꾀꼬리는 시합(試合)에 응(應)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까마귀는 노래경쟁을 제의해 놓고도, 노래 연습은 안 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에게 가져다주며 뒤를 부탁한 거였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 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白鷺)의 판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심판인 백로(白鷺)는 서슴없이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이규보(李奎報)선생이 야행(夜行)을 나와 하룻밤을 묵으며 과객행세를 하는 임금의 질문에 그 글의 뜻을 풀어준 것이다. 즉 불의(不義)와 불법(不法)으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比喩)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 란 말이 생겼다. ‘개구리로 이익을 취한 백로’ 혹은 ’개구리는 백로에게 이로움을 준다’라는 말이다.

이규보(李奎報) 선생 자신(自身)이 생각해도, 그의 실력(實力)이나 지식(智識)은 어디 내놔도 안지는데 과거(科擧)만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고, 정승(政丞)의 자식(子息)이 아니라는 이유(理由)로 늘 낙방을 한 것이 한이 되어 자자기 집 대문에 그 글을 붙여둔 것이었다.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白鷺)에게 상납(上納)한 개구리 같은 뒷거래가 없었기에 번번이 낙방(落榜)하여 초야(草野)에 묻혀 살고 있지만, 대문에 그 글을 붙여 놓고 더나들며 본다고 이규보 선생은 그 과객에게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객이 임금이리라고는 이규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李奎報 선생의 품격(品格)이나 지식(智識)이 고상(高尙)하기에, 자신(自身)도 과거(科擧)에 여러 번 낙방(落榜)하고 전국(全國)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臨時) 과거(科擧)가 있다 해서 한양(漢陽)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궁궐(宮闕)에 돌아와 임시과거를 열 것을 명(命)하였다고 한다.

과거(科擧)를 보는 날, 이규보(李奎報) 선생도 뜰에서 다른 서생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準備)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試驗官)이 내 걸은 시제(詩題)가 “유아무와인생지한(唯我無蛙人生之限)” 이란 여덟 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써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아무와인생지한(唯我無蛙人生之恨)’에서 ‘와이로(蛙利鷺)’란 말이 생겨난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註: 이 글은 성균관 부관장 (成均館 副館長) 우산(友山) 이상길(李相吉) 님의 글을 재구성한 것임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행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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