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전애틀랜타 한인문학회장
그림 이야기
옛날 중국 송나라의 재상 마지절은 고금古今의 그림들을 수집하여 감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중 송나라 제일의 화가인 대주의 ‘투우’ 즉 ‘소싸움’이란 그림을 구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상 마지절은 이 그림을 손에 넣은 그 날부터 그 그림을 애지중지했답니다.
두 마리의 황소가 꼬리를 하늘로 기운차게 뻗쳐 올리고 뿔로 상대편을 들이받는 이 그림에 흠뻑 빠졌답니다.
틈만 나면 행여 습기가 찰까 봐 마룻바닥에 펼쳐놓고 감상하며 말리곤 하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농부가 소작료를 바치려고 곡식을 싣고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절은 농부가 온 줄도 모르고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즐기고 있었답니다.
기웃거리던 농부는 그 그림을 보고는 자신도 몰래 피식 웃고 말았답니다.
그 피식 웃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일자무식 농부를 보고는 호통을 쳤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이 그림을 보고 비웃듯 피식 웃었더냐? 이 그림이 누구의 그림인지 네가 알기나 하느냐?” 하였답니다. “저 같은 무지렁이가 그런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요, 잘못했습니다요.” 라며 농부는 머리를 조아렸답니다.
그러나 마지절은, “그래, 이 그림에서 넌, 무얼 보고 웃었는지 당장 말하라.” 라며 눙부를 노려보고 있었답니다.
겁에 질린 농부는 부들부들 떨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저 같은 무식한 농사꾼이 그림에 대하여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평생 소를 키우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그림에서 싸우고 있는 소가 좀 이상해서 웃었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라며 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마지절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래 무엇이 이상한지 말해보아라.” 하였답니다.
그 말에 농부는, “황소들이 싸울 때엔 뿔로 상대편을 받으며 공격하지만 꼬리는 바싹 당겨 뒤 사타구니 사이에 끼워놓습니다.
그럴 때엔 힘센 청년이 아무리 힘을 써도 그 꼬리를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두 황소는 싸우면서 꼬리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있으니 그를 보고 소인도 몰래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용서하소서.” 라고 하였답니다.
이 말을 들은 마지절은, “비록 대주는 유명한 화가이긴 하나 소에 대해선 아는 바가 너보다 훨씬 못하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이 그림을 애지중지한 내가 부끄럽구나.” 라며 그 그림을 찢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 일화를 접하며 지난날이 떠올랐습니다.
그때가 아마 60년대 중반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유아 식품회사 Gerber가 한국으로 유아 식품을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선전하는 광고가 종로 네거리의 Bill Board에 등장하였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안고 Gerber 유아 식품을 숟갈로 떠먹이는 그림이었습니다. 엄마는 미소를 머금고 아기에게 먹이는 아주 자애롭고 행복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처음 서울에 올라온 한 시골 할머니가 시내버스 안에서 이 그림을 보고, 혼잣말로, “저건 엄마가 아니고 유몬가 보네, 기왕이면 엄마로 하지 왜 유모로 했을꼬.” 하였답니다.
마침 바로 옆자리에 앉아 출근하던 한 기자가 그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아 할머니께 물었답니다. “저 그림 속의 여인이 어머니인지 유모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라구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무엇을 먹일 때에는 자신도 몰래 입을 반쯤 벌리는 법이여. 그런데 이 그림의 여자는 입을 다물고 아기에게 먹이니까 유모지.” 이 말 한마디에 그 아름답던 그림을 내려버렸다고합니다. 아마 그 기자가 기사를 썼겠지요.
그림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그림 속에 화가의 혼이 담겨있지 않은 기교만으로 그린 그림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네 삶도 나만의 색깔로 창조해가는 삶이 참다운 삶이 아닐까 합니다.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