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안순필 선생, 멕시코 거쳐 쿠바 정착… 자녀들과 독립 자금 보내
막내 아들 안수명 옹, 올해 100세.. 쿠바 아바나 한인청년단 고문 지내기도
지역 한인 조윤수 씨, 언론에 알려
아직 한국은 한번도 못가.. 벽에 걸린 태극기로 마음 달래
쿠바 일대서 독립운동 펼친 고 안순필 선생에게 2023년 대한민국 정부는 3.1절을 맞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조선말기 병인양요가 발생한 1866년 경기도 수원 팔단면에서 탄생한 안순필(安順弼, 페드로 안, Pedro Han, 1866.8.19- 1947.2.2) 선생은 1905년 멕시코로 이민해 유카탄 남 프론테라에서 소위 애니깽으로 불리우는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다, 1921년 보수가 좀더 좋은 쿠바로 이주했다.
안순필 선생은 쿠바의 마나타 항구에 첫발을 디딘 이후,1930년대 중반 아바나(Habana)로 이주해 자영업을 운영하며, 세 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은 자금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했다. 안순필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후에 현지 한인들의 증언에 의해 발굴되어 사후 건국 포장을 받게된다.
한편, 본보 유진 리 기자와 잡 코리아 김충식 기자 등 합동 취재반은 지난 3월 25일 안순필 선생의 막내 아들 안수명 옹을 만나러 플로리다 마이애미로 향했다. 안수명 옹은 올해로 만 100세가 됐지만, 독립 유공자에 오르지 못했다.
자택을 방문하자 한쪽 벽면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안수명 옹은 “이런 형태의 디스플레이는 쿠바의 한국학교와 자신의 집에서 어렸을 때 보았던 형태”라고 설명한다.
100세의 안수명 옹을 만나러 간다하니 전 애틀랜타 정치참여위원회 김성갑 위원장이 “건강을 기원한다”며 인삼 한 세트를 전해달라고 부탁해 이를 전달하자, 안수명 옹은 “정말 고맙지만 내 체력은 40대”하고 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도 그는 쿠바에서 배운 한국어와 한글, 애국가 등을 또렷이 기억히고 있었으며, 아버지 안순필 선생에 대해서도 잘 기억히고 있었다.
아버지 안순필 선생이 1924년 쿠바에서 얻은 막내 아들 안수명 옹은 2남3녀중 차남으로, 쿠바에서 아버지와 지인들이 세운 최초의 쿠바 아바나 한국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 애국가등을 익혔고, 이후 부친 작고 후 큰 의류 공장을 운영해 부를 쌓던 중 쿠바에 공산혁명이 일어, 가진 재산을 모두 빼앗기자, 1961년 목숨을 걸고 보트로 바다를 건너 플로리다 마이애미 이주해서 유명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하다 은퇴했다.
안수명 옹이 취재진과 만나게 된 것은 마이애미에서 오랫동안 비즈니스를 해 오던 조윤수 씨 덕이었다. 조 씨는 자신의 사업체에 현지 경찰로 순찰을 돌던 현지인인 로렌조 안씨가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아버지인 안수명 옹과 할아버지인 안순필 선생에 대해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를 인연으로 조윤수 씨는 현지 경찰 로렌조 안씨의 아버지 안수명씨 옹이 독립 유공자에 오르지 못한 상황을 알고 이를 등록시키고자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 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조윤수씨는 로렌조 안 씨의 부친인 안수명 옹, 그의 할아버지 안순필 지사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주한 재미한족연합회에서 발급한 쿠바 한인 등록증에 따르면, 안순필(페드로 안)의 셋째 아들로 안수명(로렌조 안)이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디지털 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다. (안수명 옹과 그의 아들은 영문이름이 로렌조 안으로 같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이자경 연구가의 저서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1998)〉와 김재기 전남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조사를 종합하면, 로렌조 안의 할아버지 안순필 선생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해 선박용 밧줄을 만들던 에네켄 공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또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대한인국민회와 국어학교를 설립했다. 보훈처는 안순필 선생이 1918~1941년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이후 1924년 쿠바에서 태어난 아들 안수명 옹이 부친을 이어 아바나 한인청년단 고문 등을 맡으며 현지 한인사회 부흥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오는 9월, 안수명 옹은 만 100세를 맞이한다.
이날 한인 한인 동포 사회에서는 플로리다 한인연합회 신승렬 회장, 마이애미 한인회 이종주 회장 등이 함께 자리하고 안수명 옹이 기억하는 울드랭 싸인 곡조에 가사를 입힌 구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
100세가 되도록 아직 한국 땅은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안수명 옹. 그가 부른 애국가와 한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라도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그의 후손인 아들들과 딸이 한국보훈처의 웹사이트를 살펴 보았지만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해 아예 손도 못대고 있는 실정이다.
2024년은 대한민국과 쿠바 정부는 국교를 다시 맺었다. 이를 기념하고 그동안 잊혀졌거나 우리가 찾지 못했던 독립 유공자의 발굴을 위해 한국 정부의 특별한 지원이 필요했다.
*다음호에는 [독립 유공자 추서 무엇이 문제인가?] 로 제 2편이,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 못다한 이야기]로 제3편이 연재됩니다
<유진 리 대표기자>


